지금은 연락이 끊어진 오랜 친구가 있습니다. 어느 날 이 친구가 내게 부럽다는 말을 했습니다. 자기가 방황하던 청년 시절에 믿음을 가진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이 이처럼 부러울 수 없었다는 말을 합니다. 새벽까지 술을 먹고 지나가는 길에 교회가 보이더랍니다. 마침 새벽기도 시간이라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뒤따라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소리 내어 기도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아는 이름이 나오더랍니다. 간절하게 자식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아버지의 기도 소리를 들은 친구는 그 이름이 자신의 친한 친구이기에 더욱 부러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는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런데 때론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신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낙심하고, 포기하게 되기도 합니다. 너무 멀리 계신 하나님.
분명 하나님은 변함없으신 하나님이신데 내게는 왜 이런 변화가 생기는 걸까요?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부족한 믿음 때문입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요? 믿음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신 어머니,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새벽마다 자식을 위해 믿음으로, 눈물로 기도하신 그 기도가 오늘까지 우리를 이끌어 준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믿음을 가진 부모 아래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축복임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뒤에 함께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그 길을 인도하신 부모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가까이 함께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이제는 비록 뵐 수 없는 분이기도 하고, 멀리 고국에 계시기도 하고, 먼 타주에 계시기도 하지만 믿음으로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그 변함없는 모습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되는 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 경우 목사
교통체증 속에서 새치기하며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하는 차를 보며 혀를 끌끌 찹니다. 깜빡이라고 하지요, 왼쪽 오른쪽 방향 표시등을 켜지 않고 끼어드는 차를 보며 욕을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을 보며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내 말을 자꾸 끊고 들어오는 상대방으로 인해 기분이 상합니다. 내 앞에서 다른 사람 욕을 하는 사람을 보면서 다른 곳에서는 또 내 욕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 잠깐 멈칫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정죄하고, 내가 비판하고,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눈에 들은 티는 보면서 내 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며 책망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작은 흠은 정말 잘 보이는데, 내 눈의 들보는 내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는 다르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생각 뿐만 아니라 정말 달라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면 고쳐야 합니다. 내가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고쳐야지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달라져야 합니다.
나도 자유롭게 떠들 수 있습니다. 때로는 시간이 급해서 새치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또 깜빡 잊고 방향 시그널을 넣지 않고 차선을 바꿀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도, 정죄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인정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관대해지고, 내 자신은 그리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내가 보기 좋지 않고, 내 기분이 상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과 동일한 행동을 하는 상대방을 보며 반성하는 행태를 거울 치료라고 합니다. 정죄하고 비판하고 부정하게 되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고 깨달아 고치며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갔으면 좋겠습니다.
이 경우 목사
지난 주간 한 편의 부고를 받았습니다.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장례일정을 잘 마쳤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누구나 때가 되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 이제는 주님이 부르시는 때를 기다린다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아픈 질병 때문에 죽음을 기다리는 분도 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는 분도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든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편안함보다는 두려움을 전해줍니다.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특별한 상황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아픔, 아쉬움, 슬픔, 고통, 두려움 등을 전합니다.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생명이 가장 귀하게 느껴집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정말 이 땅에서의 삶에 만족함을 느끼고 죽음을 편안하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쁨이 될 수 있다고 느낄 때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예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우리에게는 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주셨고, 우리도 생명 있는 알곡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허락하셨습니다. 영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사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영원히, 영원토록...
이 경우 목사
해바라기의 앞의 해를 주님으로 바꾸어 주님 바라기, 주바라기 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사무실 옆 화단에 여러 가지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가장 키가 크고 꽃이 많이 핀 화초가 해바라기입니다. 이미 꽃이 핀 해바라기는 아침 햇살을 향해 활짝 웃고 있습니다. 아직 피지 않은 해바라기 꽃봉오리조차 햇살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섰습니다. 눈이 부셔 눈을 뜨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있지만 따뜻한 햇볕과 함께 붉은 기운이 감은 눈 위로 쏘아져 들어옵니다. 온몸에 햇볕의 따사함을 느끼며 이래서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활짝 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해바라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해바라기가 꽃이 피기 전까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동쪽에서부터 서쪽까지 해를 따라 움직입니다. 성장에 필요한 옥신이라는 성분을 좇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꽃이 활짝 핀 이후에는 그 꽃을 동쪽만을 향해 있다고 합니다. 떠오르는 해를 정면으로 받아 꽃과 주변의 온도를 높이기 위함 입니다. 꽃과 주변의 온도를 높여 벌과 나비 등의 곤충들이 많이 찾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로 꽃가루를 옮기며 번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꽃이 피기 전까지의 해바라기는 옥신이라는 성장 호르몬을 얻기 위해 하루 종일 해를 좇지만, 꽃이 핀 이후에는 자신의 사명을 위해 오직 동쪽만을 바라본다는 것이 더욱 우리가 주님 바라기가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늘 연약하고 부족합니다. 주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언제나 주님의 말씀과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숙해서는 주님께 받은 사랑을 나누고, 사명을 나누며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직 주님만을 바라며, 성숙한 믿음의 삶으로 나아 갈 때에 주님께 받은 사랑으로, 주님께 받은 능력을 나누며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드리셨습니다. 고난주간 동안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우리에게 주신 그 크신 사랑을 나누기까지 자라갈 수 있는 성도의 삶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경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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